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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운암(雲巖)김성숙(金星淑. 1898-1969)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1898-1969) 그의 일생은 우리나라 독립투쟁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남양주 봉선사에서 수학하다 손병희와 만해스님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해방 후에는반이승만 정권 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에 동참했다.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고 재야운동에 참여했다.가난 속에서 병고와 싸우다가 쓸쓸하게 절명하면서도 그가 했던 말은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야”였다.과연 운암이 이루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독립투사였고,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온갖 고초를 겪었던 민주투사로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상산 김씨

아버지 문환(文煥), 어머니 임천조씨(林川趙氏)사이에서 태어난운암 김성숙 선생은 상산군파(철산문중) 후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산김씨(商山金氏)를 상주김씨(尙州金氏)라고도 하며, 경순왕의 후손 수(需)를 시조로 하고 있다. '삼원수(三元帥)' 득배(得培), 득제(得齊), 선치(先致) 3형제가고려 때 이름을 떨쳤다. 조선시대에는 좌의정 귀영(貴榮), 대사헌 덕함, 판서 우석(禹錫),연(演),동필(東弼)등이 배출 되었다.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도 용문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니, 법명이 성숙(星淑)이다.

태허스님, 출가의 배경

  • 경기도 광주 봉은사에서 받은 1916년 12월 3일 발급된 도첩
  • 경기도 봉선사에서 1917년 7월 15일 발급된 사미과정 수료증

그의 삼촌은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내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성암은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했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실린 성암의 회고다.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는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해 쓴다면 용서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나온 성암은 만주로 향했다. 중국어를 몰랐던 그는 중국어를 안 쓰고 만주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청진으로 건너가는 길을 택했다.
원산에 도착한 그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통에 뜻하지 않게 일본군에 붙잡혀 여관에 붙들려 있게 됐다.

그가 원산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부처님오신 날이었다. 원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서강사로 구경을 가고, 시내가 텅 빌 정도였다.
성암도 여관주인을 따라 서강사로 갔다. 다음날 새벽 산책하던 중 그는 스님을 한명 만났다. 여관주인에게 벗어날 심산으로 스님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시오, 스님. 스님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출가하려 하느냐?”
“경전을 연구하려고요.”

스님은 자신을 양평 용문사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자신을 따라가면 출가할 수 있다고 했다. 성암은 그길로 용문사로 가서 출가 하였다.

“그런데 내가 한문을 아니까 경전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어. 흥미도 커지고, 그래서 2년 반쯤 초보 중노릇을 하는 모든 방법을 배웠지. 그러고 나니 나를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로 보내 경전을 정식으로 배우게 하더군.”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면서 성암은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찰의 사무도 맡아 처리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월초(月初) 거연(巨淵)스님(1858~1934)이 주석하고 있었다. 운암은 월초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1922년 4월8일 성월(惺月) 일전(一全)스님을 계사로, 월초스님을 존증아사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 때 받은 법명 ‘성숙’은 평생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스님(1879~1944)도 만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승려인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동료들과 함께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라는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인 격문을 작성하여 인근 동리에 살포하였고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1920년 출소한 그는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합법적 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그는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支會)에 알리는 등 적극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승려의 신분으로 조선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그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의 북경(北京)으로 건너가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했고,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사회운동의 분열을 반대하였다.
이곳에서 조선총독 등 일제의 고관과 친일파, 매국노등을 암살대상으로 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삼은 조선의열단에 가맹한 그는 승려신분을 벗어나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정국무위원 당선 통지서)

1926년 광동으로 갔으며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사건인 광동코뮨에도 참가했고 그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문화 총동맹과 작가연맹에도 가입하여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한 그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무력적인 행동으로써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다음 해 중일 양군이 충돌하는 이른바 노구교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 그는 현정경, 박건웅 등과 함께 조선민족 해방동맹(朝鮮民族 解放同盟)을 결성하고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조선민족투쟁동맹(朝鮮民族鬪爭同盟) 조선혁명자동맹(朝鮮革命者同盟)을 연결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조직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 하였다. 그리고 민족전선(民族戰線)의 네 단체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성하고 그는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국무위원에 취임했다.
박찬익, 최동오, 유림과 함께 그는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활동 및 외교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였으며 임시정부 내에는 새로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宣傳部)가 설치되었고 총무, 편집, 발행의 3과(課)와 함께 선전위원회가 설치되어 대한민국에 관한 일체의 선전사업과 각종 선전지도를 총괄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조소앙, 신익희 등 14명과 함께 선전계획의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피우정(避雨亭)

 

피우정은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210-10 (舊 주소: 성동구 구의리 236-6)에 건립되었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자신보다 남을 돌보던 운암 김성숙(雲巖 金星淑)선생이 말년에 가난과 병고로 말미암아 크게 고통 받았는데, 그 것을 알게 된 지인들이 마련한 11평짜리 방 한 칸이다. 운암 선생의 동지인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 대지 20평을 제공하고 지인들이 207,500원을 모금하여, 1964년 피우정을 건립하였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비나 피하라'는 뜻으로 피우정(避雨亭)이라 명명하였다. 운암김성숙선생은 1969년 4월 12일 71세의 나이로 피우정(避雨亭)에서 별세하였고, 정부는 장례를 사회장으로 하고 조계사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피우정(避雨亭)집터 

  독립장(獨立章)    

해방 후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몫을 담당했고 1955년 조봉암등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도 관여하였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루게 되었으나 독립유공자임이 감안돼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출감 이후 1965년 혁신정당(신민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82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민국 훈장증
生涯第一部分

云岩金星淑(1898-1969)他的一生与我国独立斗争的历史紧密相连。在南杨州奉先寺修学时与孙秉熙和万海僧人见面投身于抗日武装斗争,解放后参与了反对李承晚政权运动、左右联合及统一运动。

5.16之后,反对军事政权参与了在野运动。
他在贫困中与病魔斗争孤独地身亡时说的话是,

“我参与独立运动不是想得到什么报答。”
究竟云岩想要成就的是什么?

他曾担任日帝强占期韩国临时政府国务委员的独立运动志士,解放后为民主化斗争时经受各种苦楚的民族斗士,是书写韩国现代史一页的波澜起伏的人物。

Part of his life

Teach Unam Kim, Sung-suk's life keeps in with Korean history of the struggle for independence. He joined the armed struggle against Japanese colonial rulers as he met Son, Byong-hi and Monk Manhae while he studied in Bongseonsa Temple, Namyangju. And he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against the Syngman Rhee government and right and left wing coalition and unification movement after the liberation.

He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out of office being against the military after 5.16.

When he lonesomely died battling a disease in grinding poverty, he said,

“I did not carry on an independence movement hopping to receive a prize.”
What did he want to achieve?

He lived a life of extreme ups and downs decorating a page in the modern history as the fighter for national independence who became a Cabinet member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democracy fighter who experienced all sorts of difficulties fighting for democracy after the libe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