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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가 이종훈(李鍾勳)선생
관리자
조회수 : 1680   |   2011-02-28


 

◈ 천도교계 3·1운동 민족대표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20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천도교 내 지하 독립운동 조직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56년 경기도 광주 관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1883년 동학에 입도한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 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 경기·충청·강원을 망라한 20여개가 넘는 포를 아우르는 북접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던 시기 박인호 등과 함께 교단 운영에 참여하였고 1905년 12월 천도교가 창건되는 과정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중앙교단의 고위 간부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계속되던 중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조선도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게 일었다.

1919년 2월 25일,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을 만나 독립선언 참가 제의를 수락했다. 천도교 중앙교단의 최고직인 장로였던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3월 1일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천도교단의 원로로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1922년 7월, 천도교 혁신파를 중심으로 지하 독립운동조직인 고려혁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선생은 위원장 홍병기, 부위원장 최동희와 함께 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고려혁명위원회는 이후 고려혁명당으로 이어져 만주의 정의부 계열과 국내의 천도교혁신파·형평사가 연합하여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 조직이 탄로나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단행되어 고려혁명당을 주도하던 홍병기, 최동희 등 간부 대부분이 투옥되자 선생은 이러한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전쟁, 3·1운동, 고려혁명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민족 독립을 실현하고자 평생을 매진했던 선생은 1931년 5월 2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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