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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김상덕(金尙德)선생
관리자
조회수 : 2576   |   2010-02-01


2월의 독립운동가 김상덕(金尙德)선생 (1891. 12. 10 ~ 1956. 4. 28)

 

◈동경2.8독립선언 대표◈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동경 2.8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중국에서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문화부 부장으로 활동한 김상덕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북 고령군 저전동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배움에 대한 뜻을 잃지 않고 한학으로 학문적 소양을 다진 뒤 1915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해 유학생들과 민족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9년 1월 6일, 동경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하는 모임으로 확대되었고, 선생은 독립선언서 작성과 발송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어 김도연.백관수.최팔용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낭독을 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제에 체포.구금되었다가 1920년 2월 9일 출옥하였다. 1920년 3월 5일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선생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의 주장에 임시정부를 유지 하면서 개혁하자는 개조파의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청년동맹회를 결성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선생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은 만주지역에서도 계속되었다. 1928년 시사연구회 책임비서로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를 개최하였으며, 이어 같은 해 12월에 지린(吉林)에서 혁신의회와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는 등 민족유일당운동으로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유일당운동은 참여한 독립운동단체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결렬되었고, 1931년 일제의 만주 침공으로 선생은 다시 중국 본토로 건너 왔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관내 지역 민족운동 세력의 통일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난징(南京)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할 중심 기구로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고, 선생은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치장(기江)을 거쳐 1940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重慶)으로 이전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선생은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요청하는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임시정부에서도 학무부 차장을 거쳐 문화부 부장에 선임되어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임정요인과 함께 귀국한 선생은 비상국민회의 대의원과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을 지냈고, 1948년 5월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시다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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