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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장석천(張錫天)선생 선정
관리자
조회수 : 1765   |   2009-10-31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빛나는 주역 ◈

 

국가보훈처는 광주학생독립운동 80주년을 맞아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학생항일투쟁 지원 및 학생항일 독립운동의 전국 확산에 주도적 역할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한 장석천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03년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1918년경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차별과 인격적 모멸에 저항하여 보성고보로 전학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한 선생은 1926년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지만 4개월 만에 광주로 돌아와 청년회 활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광주청년회는 시내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 결과 1926년 11월 초에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성진회"가 결성되었다.

"성진회"는 이듬해 3월 해산되었지만 "성진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 ‘연구모임’이 지속되었고, 1929년 6월에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광주청년동맹 집행위원이던 선생은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였고, 아울러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전남지역 단일 청년연맹 조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제1차 광주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주동학생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은 학생뿐만 아니라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을 자극하여 제2차 시위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즉시 광주지역 사회단체 책임자들을 불러 모은 뒤 대책을 논의하고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마침내 11월 12일, 독서회원들을 중심으로 제2차 광주학생운동이 촉발되었다. 선생은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허헌과 시위의 전국 확산을 협의하고 직접 서울로 올라와 시위를 추진하였다.

휘문고보·보성고보·경신학교·배재고보·중동학교 등의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구체적인 행동방법 등을 지도하였다. 격문살포 등 시위가 본격적 전개되던 12월 5일 선생은 관련자 1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1년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선생은 사회운동을 재개하면서 노동조합의 조직 및 결사단체와의 연대를 위해 노력하던 중 1932년 10월 다시 체포되어 징역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 가출옥하였으나 1935년 10월 18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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