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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안명근(安明根)선생 선정
관리자
조회수 : 1660   |   2009-10-03


 

◈15년 옥고 치른 군자금 모집의 전설◈

국가보훈처는 안중근 의사 의거 이후 무장투쟁을 위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15년 옥고를 치른 안명근 선생의 탄신 130주년을 기리고자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7살이 되던 해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어린 시절 사촌형 안중근과 함께 성장하며 화서학파의 학통을 이은 고능선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당시 청계동으로 몸을 피해 잠시 머물던 백범 김구와도 만날 수 있었다. 안명근 선생이 구국운동에 나서는 것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러일전쟁 후였다.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선생은 해서교육총회의 중심적 인물로 활동하면서 교육구국에 매진해 갔다.

그러던 중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세상을 진동시키고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선생은 원대한 뜻을 품고 독립운동을 추진해 갔다.

그는 신민회 인사들과 힘을 합하여 서간도·북간도 등지의 해외독립군기지 개척에 앞장 서는 한편 매국노 이완용·송병준 처단 등과 같은 강도 높은 의열투쟁과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 등을 다양하게 구상하였다.

이후 선생은 김구를 찾아가 자신의 독립운동 계획에 함께 참가할 것을 요청하는 등 동지를 규합하여 무장·의열투쟁을 추진하고자 하였고, 먼저 무기를 구입한 뒤 준비 단계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나서 안악.신천의 부호를 찾아다니며 1만원 가량의 자금을 모았다.

1910년 11월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과 민영설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다가 이들의 밀고로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일제는 이 일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신민회 황해도 지회를 탄압하기 위해 김구 등 160여 명을 체포 투옥시켰고, 신민회 간부들까지 재기소 하는 등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서북 지역 독립운동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종신형을 언도받은 선생은 15년여의 옥고를 치르다가 가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7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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