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상정을 2017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상정은 1896년 대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한국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1901~1966)가 둘째이며, 셋째 이상백(1904~1966)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 넷째 이상오(1905~1969)는 수렵가이자 저술가이다.
그는 1910년대 초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학과 미술, 상업, 군사학 등을 배웠다. 특히 예비군사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진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에서 수학한 경험은 훗날 중국군에 복무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17년 경 국내로 돌아와서는 대구 계성학교의 미술 교사로 재직했고, 1920년대 초에는 정주의 오산학교와 평양의 광성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5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권기옥과 결혼하였다. 이들은 광복이 될 때까지 내몽고와 베이징, 상하이, 난징, 충칭 등 중국 대륙을 다니며 부부이자 동료로서 독립운동을 함께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이상정은 중국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전선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중국 국민당 펑위샹(馮玉祥) 군 참모부에서 근무하였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소장교관으로 취임하여 한중연대에 주력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을 주도하여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에 선임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개조와 통합을 주장하여 변화를 모색하였고, 중국군이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려 할 때는 자주적 관점에서 강력하게 이를 비난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상하이로 가서 한인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47년 7월 모친상으로 9월에 귀국하였으며, 10월에 뇌일혈로 별세하였다. 유고집으로 『표박기(飄泊記)』가 있어 그의 예술가적 면모를 엿보게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