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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붓다]3·1절 인터뷰-민성진 운암회장
관리자
조회수 : 2218   |   2010-03-01


<사진설명>조계사에서 봉행된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장례식 봉행장면.

“臨政국무위원 독립운동가 태허스님 기억했으면”

해피빈 모금 등 기념관 건립 매진…불자동참 기대

3.1절이다. 이맘때면 늘 불교인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기리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불교계의 독립운동은 왠지, 다른 천도교나 개신교 등 이웃종교나 단체들에 비해 왜소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만해 스님처럼 그 숫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학들은 그 역할과 정신을 기리는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근자에 들어 만해스님과 용성 스님을 기리는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부족함을 메우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만해, 용성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선 위대하고 자랑스런 스님 태허 김성숙은 일반불자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하다. 따라서 그를 기리는 불교계의 움직임도 미약한 실정이다.

태허 김성숙 스님은 누구인가. 그는 스님으로서, 아니 종교인으로서 유일하게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낸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국무위원이란, 오늘날의 장관보다도 더 요직인 부총리급 고위직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를 아는 불자는 최근까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외손자 민성진이 운암김성숙(태허스님)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이전에는 근대불교사를 공부하는 몇몇만이 태허스님의 독립운동 흔적을 일부 접했을 뿐이다.

만해스님과 용성스님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민족의 기개를 드높이셨지만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간독립운동 조직의 독립운동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태허 김성숙 스님은 임시정부의 핵심 국무위원으로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진두 지휘하며 정부차원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독립운동의 성격상 뚜렷한 차이가 있다.

만해스님과 용성스님은 뒤늦게나마 그 위대한 독립여정이 후학들에 의해 선양되고 있는 중이지만, 태허 스님은 이제야 사단법인 운암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선양작업이 진행 중이다.

올 3·1절을 맞아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만나 태허스님(운암 김성숙)과 그의 독립운동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사업회의 활동과 그 움직임의 소중한 의미를 들어보았다.

-태허스님의 독립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가?

“대한제국때 정위(正尉)를 지낸 삼촌의 영향을 받고, 불교에 입문하여 월초스님 상좌로 공부를 하며 스님의 소개로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를 하며 영향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태허스님의 독립운동 과정을 간략하게 점검한다면….

“초기 중국 잠입 후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면서 《혁명》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으며 님웨일즈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장지락)의 스승으로서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하셨고, 고려유학회(高麗留學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뽑혀 활동하였다. 승려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태허스님은 일본제국의 침략 수뇌부를 암살하는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으로 활약했으며 "혁명동맹"의 주필을 맡으셨다. 또 1926년 유학한국혁명청년회(留學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행동(革命行動)》을 발간하였으며, 1927년 8월 중국공산당의 광주봉기에 참여하셨다. 그 해 대한독립당촉성회(大韓獨立黨促成會) 광동지구 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셨다. 이후 재중국조선청년동맹 등을 직접 조직하는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고, 1931년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하였으며, 반제동맹의 기관지 《봉화(烽火)》와 《반일민중(反日民衆)》이라는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중국군 19로군(十九路軍)에도 종군하셨다. 1936년에는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였으며, 선전부장에 취임하셨고,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연맹 선전부장이 되셨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생하자 정당통합에 참여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조선민족혁명당 등 3개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는데 가담하셨다. 1938년 민족혁명당의 부당수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설립하자, 태허스님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정치부 주임에 선임되셨다. 이후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등을 지내셨다.”

-중국 임시정부에서의 역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면….

“태허스님(김성숙)은 김원봉 일파와 김구 일파와 크게 대립했다고 증언하셨는데, 이때 태허스님(김성숙)은 김원봉과 김구의 대립을 조절하려 하셨다. 태허스님은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고,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게 되었고, 그 뒤 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임시정부행을 선택하게 되며 좌. 우가 힘을 모은 최강의 ‘임시정부’가 탄생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때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입각하였으며,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으로 취임하셨다. 1944년 국무위원을 지냈고,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 등을 역임하셨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산하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주 중국 소련 대사관(중경 소재)과 임정간의 외교를 담당하며 대소련 외교의 창구 역할을 하셨다(당시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한 러시아인의 증언을 참조함). 그러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이 미국과 접촉하면서 반소 활동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던 소련의 항의를 받자, 이승만을 면직시켜야 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독립운동에서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정파와 계파가 다른 사람들이 한목소리를 내려고 하니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고 열악한 환경서 강국들의 감시 하에서 피신한 정부의 업무를 하려니 소련. 중국 등 열강들의 눈치도 보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태허스님의 김구와 김원봉의 갈등 조정은 매우 의미가 있는 업적으로 본다.”

-태허스님의 독립운동의 성과와 계승할 점, 다른 분들과 차이점을 알려 달라

“태허스님은 근대불교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일제의 강점기를 살면서 민족의 지도자와 불교의 선각자적 스님으로서 그 시대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위업을 성취한 분인 ‘월초스님’의 상좌로서 독립운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봉선사(奉先寺)스님으로 부끄럼 없이 조국 광복을 위해 살아가신 분이다.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 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서 살아가시다 말년에 가난과 탄압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살다 간 이 시대의 진정한 투사이자 애국자였다. 그러한 점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본받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다른 점은 아마도 역사 이래 나라를 사랑하고 지켰던 ‘호국불교’와 스님으로서의 종교적인 힘을 바탕으로 다른 분보다는 사명감을 조금 더 갖고 독립운동에 임하셨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태허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 활동을 하고 계신데, 소개해달라.

“태허스님 사후 36년이 지난 2005년 8월 종로구 부암동 울트라오피스텔에서 운암선생기념사업회가 외손자인 본인(민성진)이 중심이 되어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 지난 2006년 국가보훈처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사업회의 취지와 연역은?

“태허스님의 숭고한 유업을 기리고 선양하며, 선생의 위대한 민족정기를 온 겨레가 함께 고양함으로써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세계만방에 평화가 충만하게 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2003년 11월부터 운암김성숙선생(태허스님)기념사업회 추진을 준비했고, 2004년에는 중국에서의 활동상황을 연구했다. 2005년 10월부터 자료수집(도서문건, 기록, 사진 등)에 들어갔고, 이를 위해 운암 김성숙선생의 유족인 중국 아들 3형제 방문하여 자료를 요청했으며, 운암 김성숙선생 학술세미나 개최 협의, 운암 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설립에 대한 협의 등을 마쳤다.”

-불교계에서의 활동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

“2005년 11월 친일파 후손 땅 찾기 반대 촛불집회 참석 (조계사)하고, 봉선사를 방문, 조실월운 스님, 회주 밀운스님, 주지 철안스님에게 운암 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설립 준비를 상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봉선사 문중회의 참석하여 운암선생 테마파크 건립지로 용문사 부지 약 20만평 영구 무상임대 등을 협의했다. 그것이 시작이 아닌가 한다.”

-정치권 원로들도 찾아 협조를 구했다고 들었다.

“2006년 1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방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설립 취지를 설명했고, 이어 발기인 대회 및 창립총회를 동아 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개최해 제1대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취임했다.”

-2006년 3월 조계사에서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추모제를 거행한 것이 본격적인 불교계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 그해 3월 제37주기 운암김성숙선생 추모제를 조계사에서 거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불교계 안에 태허스님, 즉 운암 김성숙의 존재와 활동 등에 대해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그 와중에 용문사부지 약 20만평 영구임대를 확정(운암테마파크)했고, 4월과 5월에는 부처님오신날 연등행사참여 운암 김성숙 선생의 홍보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치고 도선사, 봉원사, 봉은사 등 주요사찰을 찾아 홍보활동을 벌였다.”

-이후 매우 활발하게 움직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2006년도 주요 활동을 소개해 달라.

“그 즈음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았고, 이를 기해 제1기 운암 김성숙선생 항일독립운동 탐방참가자 모집을 각 언론에 기사와 광고를 공고했다. 6월에는 독일월드컵 응원 ‘쓰레기봉투’를 시청, 광화문 등지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행사를 가졌고, 8월에는 제1기 운암 김성숙선생 항일독립운동 중국사적지 탐방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 (8/7-8/15)했다. 9월에는 1기 탐방단 대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수여했으며, 중국 북경대 교수와 학생 국내초청 행사를 가졌다. 10월 봉선사 법회 참여 운암김성숙선생 홍보행사, 11월 상산김씨 종친회 참가하여 운암 김성숙선생 홍보, 운암 김성숙선생의 출신학교인 중국 광주 중산대를 방문하여 운암 기념관건립 1차 협의를 하는 등 숨가뿐 일정을 보냈다. 12월에는 공익성 기부금 대상단체러 지정(재정경제부)되기도 했다.”

-2007년도에도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주요 활동에는 어떤 것이 있나?

“2007년 1월 중국 중산대 부총장 본회 방문 운암기념관 건립 2차 협의를 시작으로, 같은 달 운암 청년단 불우 무의탁노인돕기행사(매월 1회 자광원)를 시작했다. 2월에는 3․1절 태극기 게양운동을 위해 태극기를 무료로 배포하는 행사를 서울명동을 비롯하여 광역시 5개 도시에서 대대적으로 펼쳤다. 제38주기 운암 김성숙선생 추모식을 서울국립현충원에서 봉행했고, 5월에는 연등축제에 참여, 운암 김성숙선생 홍보활동을 했다. 8월에는 제1회 운암 김성숙선생 학술대회를 동국대 원흥관에서 성대히 개최했고, 이어 제2기 운암 김성숙선생 항일독립운동 중국사적지 탐방행사를 개최했다.(8/7-8/15) 10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2008년 4월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 추진작업을 마무리했고, 11월에는 2기 탐방단 장학금 지급과 중국 중산대 방문 운암 기념관건립협의 M.O.U를 체결했다.”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은 어떤 것들이 있나?

“현재는 기념관 건립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당초 용문사에서 배정해주는 부지에 기념관 설립을 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현재 서울 지역에 기념관 부지 배정을 마무리 짓고, 구체적인 협의에 들어가 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운동가 태허 스님에 대해 불교계가 홀대를 하고, 무관심한 것에 대해 아쉬움과 서운함도 한 때 있었으나, 평생을 도첩을 보관하며 당신이 승려의 길을 걸었던 것을 잊지 않으신 외조부 태허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잊었다.

최근에는 태허스님 기념관 건립을 위하여 지난 1월 25일부터 우리나라의 대표 포털사이트인 네이버 "해피빈 (http://happylog.naver.com/9100ua.do)에서 ‘항일운동기념관 건립 모금’을 시작했다. 특히 이번 모금은 ‘운암청년단’이 주축이 되어서 ‘해피빈’ 콩 모으기 모금에 동참, 현재 260여명의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시고 있다. ‘해피빈’ 모금은 ‘운암항일운동기념관’이 건립되는 그날까지 계속되며, 기념관이 건립되는 날 모금된 분들의 성의에 보답하는 행사도 개최할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불자들께 당부할 말씀이 있다면?

“태허스님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독립투사요,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 투쟁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민주투사로 질곡의 현대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만해 한용운스님, ·김법린 등과 함께한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였는데도 사회주의 계열이라고 포장하여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로 남아있는 봉선사 태허스님(운암 김성숙)을 불자님들이 기억하시고 그 분을 좀 더 알아보려는 노력을 해주셨으면 감사하겠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 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서 살다가 11평 단칸방인 광진구 구의동 ‘피우정’서 돌아가신 태허스님,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된 태허스님(운암 김성숙)은 말년에 가난과 탄압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살다 간 이 시대의 진정한 스님이며 투사였다. 태허스님은 사후 13년 뒤, 19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고, 사후 35주년인 2004년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유해가 안장되었으며,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심사하는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셨다. 올해는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최대 구심체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1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태허스님의 높은 뜻을 전파할 ‘운암항일운동기념관건립’은 후손과 후학들에게 국가와 민족과 동포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스스로 삶의 표본과 중심을 일으켜 세우는 산교육의 장소로 자리 잡고 선생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고 사상과 정신을 선양하는 일을 해나갈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용성스님, 만해스님, 태허스님 세분이 선정되었다. 세분 중 용성, 만해스님은 기념관을 건립하여 큰 스님의 뜻을 알리고 있으나, 마지막 남은 태허스님은 이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불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이 있었으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스님의 선양작업에 모든 불자들이 불사를 하는 마음으로 참여주시기를 거듭 당부드린다.”

*태허스님(운암 김성숙)은 어떤 분?

1.생애 전반- 출가 후 독립운동 투신 태허(太虛)스님은 평안북도 철산군 (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출생(3월10일)하시고, 해방 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으로 전적했다. 고향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우고, 경술국치 이후 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스님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직접 한문을 가르쳤고, 이 때 배운 한문이 불교경전을 배우는 태허스님 학문의 밑거름이 되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이 싹틀 무렵 태허스님은 집을 찾아온 삼촌(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내다 1907년 군대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1916년 봄에 중국 봉천에 있는 신흥군관학교에 입학하려고 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가에 입문했다.

그때 경기도 용문사에서 오신 ‘풍곡신원(楓谷信元)’ 선사를 만나게 되고 그 길로 선사를 따라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계시던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란 법명을 받고 스님의 길로 들어섰다.

1918년 봉선사로 옮겨 불교 교리를 공부하던 중, 월초스님의 소개로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3.1운동의 주역인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를 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남양주군 (南楊州郡) 진접면(榛接面)에서 같은 스님인 이순재(李淳載), 김석로(金錫魯), 강완수(姜完洙)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다 일경에게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태허스님은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중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1920년에 일제가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자 합법적으로 조직된 무산자동맹 (無産者同盟)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에 참석하여 노동공제회에서 태허스님은 충북 괴산(槐山)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小作爭議)의 진상을 서울 본회 및 각 지방 지회 (支會)에 알리는 등 적극적 항일민족운동을 스님신분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2.독립운동-중국내 활동 태허스님은 봉선사 월초스님의 뜻에 따라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북경 (北京)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고려유학생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 (創一黨)"을 조직,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해 사회운동의 분열을 반대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책인 님 웨일즈 ‘아리랑’에 주인공인 김산(장지락)의 정신적 스승으로써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가맹하였고, 조선의열단에서 봉선사 스님신분임에도 선전부장(宣傳部長) 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5년 중국의 중산 손문(孫文) 선생이 영도하는 ‘국민혁명운동’에 가담한 관계로 북경정부의 적시가 되어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돼 광동성 광주시 소재 중산(中山)대학으로 옮겼고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1926년 300여명의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유학한국혁명 청년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혁명운동》을 편집 간행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와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제창했다. 태허스님은 1928년 중산대를 졸업하고 ‘광둥코뮨’에 참여했으나 실패, 중국 여성 항일운동가인 두군혜(杜君慧)의 집에 피신하였다. (중산대에 다니던 두군혜(杜君慧)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 중국 공산당 총리를 지냈던 주은래(周恩來) 선생의 소개로 만났던 두군혜 여사와 결혼을 하여 아들 삼형제를 두게 된다).

1929년 상해로 이주하여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在中國朝鮮靑年總聯盟)’을 조직, 중국 문화총동맹과 작가연맹에 가입하며 신문화운동 전개하였다.

1932년 태허스님은 백숭도 (白崇禱) 장군의 추천으로 중국 광서성 성립(省立)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로 활동하며 생애 유일의 안식기를 보냈다. 1934년 다시 상해로 돌아온 이후 30년대 전반기까지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 등 20여권 책을 번역 또는 저술하여 진보적 문필가로도 명성을 떨치며 원고료로 받은 돈으로 열악한 독립 운동가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그해 태허스님은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 기관지 《민족해방》을 편집·간행하고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민선)을 조직,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민족전선》을 편집·간행하였다.

1938년 광복진영 (光復陣營)의 9개 단체가 광복군에 편입, 태허스님이 참여한 민족전선(民族戰線)의 네 단체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의용대통신》을 편집·간행하였다.

1939년 태허스님의 조선민족해방동맹은 한국광복전선과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해 대일항전의 지장을 막고 임시정부로 총 단결할 것을 주장하며 41년 6월 손문(孫文)의 아들 손과(孫科)가 회장, 한국독립당 조소앙과 김규식이 부회장으로 참여한 한중문화협회에 상임이사 겸 선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태허스님은 김원봉과 김구의 대립을 조절하려 노력을 하였고, 태허스님에 의하면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또 태허스님은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계열의 지원을 받고,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경쟁관계를 부추긴 것”이라고 보았다.

김원봉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 대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반대하였고, 태허스님은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으며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태허스님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그 뒤 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임시정부 행을 선택하게 되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하였다 . 1943년 2월, 박찬익(朴贊翊) 최동오(崔東旿) 유 림(柳林)과 함께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연구위원으로 임명돼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활동 (對列强外交活動) 및 외교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4월에는 임시정부 내 새롭게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宣傳部)가 설치되고, 이 선전부에는 총무, 편집, 발행의 3과(課)와 함께 선전위원회가 설치되어 대한민국에 관한 일체의 선전사업과 각종 선전지도를 총괄하여 행하도록 하였는데, 태허스님(김성숙)은 조소앙(趙素昻) 신익희 (申翼熙) 등 14명과 함께 선전계획의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UN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 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

태허스님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유엔대표였던 ‘둥비우’로부터 이승만의 일을 전달받고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임정은 소련에 해명과 사과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5년 일제의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8월15일 종결되어 다른 임정요인 (臨政要人)들과 함께 중경(重慶)의 임시정부 청사를 철수, 상해로 이동했고(11월5일), ‘입국 전 약법3장" 발표 같은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홍진(洪震)·조성환(曺成煥)· 신익희·조소앙 등 13명과 이계현(李啓賢)·서상열(徐相烈) 외 9명을 포함한 23명이 상해를 출발, 12월 1일 군산(群山)비행장에 도착하여 임정요인 2차 환국으로 12월 2일 서울로 들어왔다.

3.국내 귀국 후 정치활동-야당

1946년 2월 4일 이승만·김구 등 우익 진영에서 비상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2월 14일 좌익에서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자 김성숙은 모두를 비판한 뒤, 독립노동당(獨立勞動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1946년 2월 15일 장건상, 김원봉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담하였다. 이후〈노동신문〉을 창간하였고 1947년 전국혁명자총연맹 창립에 참여하여 위원장을 지냈고, 당시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통한 한국 정부수립 문제 해결과 단독정부 수립 등에 모두 반대하여 이때부터 미군정과 이승만 계열의 정적으로 부상되었다.

1948년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선출 되었으나 국민의회가 몰락하자, 좌익계열을 제외한 인원으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대표간사에 취임하며 단주 유림 등과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지도하였다.

태허스님은 제 2대 민의원선거 경기도 ‘고양군’에서 입후보했으나 낙선하며, 6.25 사변이 일어나고 조선노동당의 합류 유혹을 뿌리치고 피신하였다.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정부가 ‘부역자"로 체포, 1개월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52년 부산광역시에서 야당과 연합해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결성하여 이승만 정권의 재집권에 반대하였다.

1957년 진보당과 민주혁신당 양쪽에서 입당 또는 협력의 교섭을 받았으나 재야혁신세력을 규합한 민주혁신당을 선택해 정치위원으로 피선되며 혁신세력대동통일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은 물론 노농당, 대중당까지 모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이승만 정권은 태허스님(김성숙)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체포하여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61년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10개월간 감옥에서 지내셨으나 환갑이 넘고 ’대한민국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태허스님은 1968년 이후 재야통합 야당인 ‘신민당’ 지도위원에 선출되었다.

4.타계 후 인물조명과 추모열기

사후 36년이 지난 2005년 운암선생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2006년 국가보훈처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사후 13년 뒤, 19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고, 사후 35주년인 2004년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2008년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심사하는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이학종 (urubella@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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