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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이덕일 사랑] 김성숙(金星淑)과 장지락(張志樂)
관리자
조회수 : 1995   |   2008-04-14


이덕일 ·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80년대 대학가의 필독서(?)였던 "아리랑"은 김산(金山)이란 가명으로 잘 알려진 장지락(張志樂)의 일대기이다. 장지락은 1937년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던 연안(延安)에서 "중국의 붉은 별"의 작가 에드거 스노의 부인 님 웨일스에게 자신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장지락은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든 사람은 김충창이었다"면서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를 소개했다. 그는 "김충창은 우리의 정치이론가였고, 오성륜은 실천행동가였으며, 나는 모든 면에서 그들의 어린 제자였다"라고도 말했는데 김충창이 이달의 독립운동가인 김성숙(金星淑)이다. 김성숙 자신은 1960년대 중반 재미(在美) 정치학자 이정식(李庭植)에게 금강산이 아니라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와 광릉의 봉선사(奉先寺)에서 승려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른 후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해 장지락을 만난 김성숙은 1927년 중국공산당이 주도했던 광주(廣州) 봉기(蜂起)에 적극 가담한 좌파 활동가였다. 중국의 여류 작가 두군혜(杜君慧)와 결혼한 김성숙은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에 함께 가입해 활동했다. 장지락은 "아리랑"에서 "1931년에 김충창은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하여 화남(華南)으로 갔다"고 그와의 이별을 전하고 있는데, 김성숙은 실제 광서성사범대학(廣西省師範大學) 교수를 역임하기도 한다. 이후 김성숙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좌파 민족주의자로 탈바꿈한다. 좌파 민족주의세력의 협동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해 내무차장과 국무위원을 역임하다가 해방 후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다. 1937년 연안(延安)에서 님 웨일스를 만난 장지락은,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지락은 1938년 연안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강생(康生)에게 일제의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다. 혐의 하나로 전 인생이 부정되던 시대를 개인의 신념만으로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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