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센터
  • 언론속의 운암

언론속의 운암

게시판 내용
[미디어붓다]태허스님 4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관리자
조회수 : 1967   |   2008-04-07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스님 출신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1898-1969·태허 스님)을 200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8일 밝혔다. 태허 스님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에서 태어나 1916년 경기도 용문사에서 불교에 입문해 불교 교리 공부 후 근대 사회과학에 눈떴다. 태허 스님은 1919년 3.1운동 때 양주.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피체돼 2년 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 조직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 관여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사회대중당에 참여해 정치위원과 1961년 2월민족자주통일연맹 중앙협의회 의장단에 선출됐고, 1964년 신한당 창당에 참여해 신한당 정무위원을 거쳐 재야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운영위원과 지도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태허 스님은 이승만 정권 시 "부역" 혐의로 체포돼 다시 옥고를 치렀고, 70세를 넘어서 약값 마련도 어려운 가난에 묻혀 지내다 1969년 4월12일 오전10시 눈을 감았다.정부는 1982년 스님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운암 김성숙 선생 연보> 1898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출생(3월10일). 이후 경기도 고양군으로 전적. 1907 (9세)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움. 경술국치 이후 독 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김성숙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 신 직접 한문을 가르침. 이 때 배운 한문이 불교경전을 배우는 등 그의 학문의 밑거름이 됨. 조국에 대한 사랑이 싹틀 무렵 김성숙은 그의 집을 찾아온 삼촌의 영향을 받게 됨. 김성숙의 삼 촌은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내다 1907년 군대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 물로 김성숙은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 1916 (18세) 신흥군관학교에 입학하려고 봉천으로 가려다 일경에 체포돼 뜻을 이루지 못함. 경기도 용문사에서 오신 풍곡 신원(楓谷 信元) 선사를 만나게 되고 그 길로 선사를 따라 용문사로 들어 가 출가,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계시던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란 법명을 받음. 1918 (20세) 봉선사로 옮겨서 불교 교리를 공부. 월초스님의 소개로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손 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 1919 (21세)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봉선사 승려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승려인 이순 재(李淳載), 김석로(金錫魯), 강완수(姜完洙)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 에게 살포하다 일경에게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1920 (22세) 출옥 후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중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킴. 1920년에 일제가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자 합법적으로 조직된 무산자동맹 (無 産者同盟)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에 참석. 노동공제회에서 김성숙은 충북 괴산(槐山)에서 일어 난 소작쟁의 (小作爭議)의 진상을 서울 본회 및 각 지방 지회 (支會)에 알리는 등 적극적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1922 (24세) 승려 신분으로 조선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공제회에 가입 ,활발한 활동. 1923 (25세)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고려유학생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 (創一 黨)"을 조직,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해 사회운동의 분열을 반대. 김산(장지락)의 스승으 로서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가맹. 조선의열단에서 승려신분임에도 선전부장(宣傳部長) 으로서 왕성히 활동. 1925 (27세) 1925년 중국의 중산 손문 선생이 영도하는 국민혁명운동에 가담한 관계로 북경정부의 적시가 되어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돼 광동성 광주시 소재 중산(中山)대학으로 옮김. 정치경제학을 전공. 1926 (28세) 300여명의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유학한국혁명 청년회를 조직해 기관지 《혁명운동》을 편집 간행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와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제창.1928 (30세) 중산대 졸업 . 광둥코뮨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자 두군혜(杜君慧)의 집에 피신. 1928 (30세) 상해로 이주.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在中國朝鮮靑年 總聯盟)을 조직. 중국 문화총동맹과 작가연맹에 가입, 신문화운동 전개(1929). 1932 (34세) 백숭도(白崇禱) 장군의 추천으로 중국 광서성 성립(省立)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로 활 동. 생애 유일의 안식기를 보냄. 1934 (36세) 다시 상해로 돌아온 이후 30년대 전반기까지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 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 등 20여권 책을 번역 또는 저술하며 진보적 문필 가로도 명성.1936 (38세)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 기관지 《민족해방》을 편집간행. 1937 (39세)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민선)을 조직,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민족전선》을 편집간행. 1938 (40세) 광복진영 (光復陣營)의 9개 단체가 광복군에 편입, 김성숙이 참여한 민족전선(民族戰線) 의 네 단체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조선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의용대통신》을 편집간행. 1939 (41세)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은 한국광복전선과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해 대일항전의 지장을 막고 임시정부로 총 단결할 것을 주장. 1941년 6월 손문(孫文)의 아들 손과 (孫科)가 회장, 한국독립당 조소앙과 김규식이 부회장으로 참여한 한중문화협회에 상임이사 겸 선전위원으로 선출. 1942 (44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 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 . 1943 (45세)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연구위원,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 활동 및 외교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선전부(宣傳部) 설치에 따른 선전위원 활동. 임정 국무 위원으로 선출(1943). 무임소 국무위원(1944년) 1945 (47세) 8월15일 광복. 다른 임정요인들과 함께 중경의 임시정부 청사를 철수, 상해로 향함(11월 5일), ‘입국 전 약법3장" 발표. 같은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홍진(洪震)·조성환(曺成煥)· 신익 희·조소앙 등 13명과 이계현(李啓賢)·서상열(徐相烈) 외 9명을 포함한 23명이 상해를 출발, 군 산(群山)비행장에 도착(12월1일). 서울로 들어옴(12월2일). (* 입국 전 약법3장 : 1. 임정은 좌우 어느 파에도 편향되지 않고 초연한 입장에서 양파의 대 립을 해소시켜 나간다. 2. 비상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임정헌법의 국호, 연호를 채택하며 임정의 정원을 확대.개편해 한국민주정부를 재조직한다. 3. 미.소에 대해서는 평등한 원칙 아 래 외교관계를 세운다. 이 같은 김성숙의 입국 전 약법3장은 1945년 12월3일 경교장에서 열 린 임정 국무위원회에서 약법 장의 결행을 촉구, 다수의 결정으로 비상국민대표회의 소집.) 1946 (48세)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 임정의 김구, 김규식 등이 외국 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에 소속된다는 것은 민족과 일찍 숨진 독립운동가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장하며 장건상, 김원봉, 성주식 등과 함께 임정을 떠남.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전)에 가입, 부의장 역임. 미군정을 반대한 혐의로 전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겪음. 1947 (49세) 근로인민당(여운형) 결성에 참여해 중앙위원에 선출.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당내 좌파계 열 월북 등으로 1949년 12월 공식 해체. 1950 (52세) 제2대 민의원선거 경기도 고양군에서 입후보했으나 낙선. 6.25 발발. 조선노동당의 합류 유혹을 뿌리치고 피신.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정부가 ‘부역자"로 체포, 1 개월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 1955 (57세) 조봉암 등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 관여. 5.16 이후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 로 다시 옥고를 치름. 1957 (59세) 진보당과 민주혁신당 양쪽에서 입당 또는 협력의 교섭을 받았으나 재야혁신세력을 규합 한 민주혁신당을 선택해 정치위원으로 피선. 혁신세력대동통일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은 물론 노농당, 대중당까지 모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함.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위 반으로 체포,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름. 1960 (62세)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을 창당, 11인의 총무위원회위원으로 선출. 제5대 민의원선거에 고양군에서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 1961 (63세)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선출.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 로 낙인찍혀‘반국가행위"를 이유로 10개월간 옥고.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 유공자임이 참작, 석방됨. 1965 (67세)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발기, 대표위원으로 추대됨. 1966 (68세) 신한당에 발기인으로 참여, 정무위원으로 활약. 1967 (69세) 신한당과 민중당의 통합으로 신민당 창당, 운영위원으로 활약. 1968 (70세) 신민당 지도위원으로 선출됐으나 오랜 가난과 병고에 시달려 고통 받다 친지들의 주선으로 마련한 단칸방 "피우정(避雨亭)"에서 기거. 1969 (71세) 서거(4월12일). 병원비가 없어 사후 6시간이 지나도록 시신을 옮기지 못함. 1982 서거 13주년.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2004 서거 35주년. 7월28일 국립묘지 유해 안장. 이학종기자

file0 File #1   |   img.jpg232.jpg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한국일보]이해찬 "정치 정리하고 민족사 활동"
다음글 [연합뉴스]운암 김성숙선생 제39주기 추모제 및 학술강연회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