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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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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스님출신 독립운동가, 불교계 어찌 외면!!
관리자
조회수 : 3592   |   2006-01-25


운암 김성 숙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난 23일 기념사업회 발기인대회 및 창립총회 를 개최했다 가난한 중생위해 일생 바친 "보살" 만해스님 영향 3.1만세 운동 가담 만년 야당 정치가, 운암(雲岩) 김성숙(金星淑.1889~1969) 승려출신의 유일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운암 선생을 대한불교 조계종,한국불교태고종 등 불교계에서 관심밖에 일로 치부하면서 독립 운동 기념사업회 등 관련단체들이 불교계를 성토하고 있다. 해방 60년만에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운암 김성숙선생기념사업 회.http://www.kimsungsuk.or.kr)설립을 위해 지난 1월23일 "발기인대회 및 창립총회"를 동아일보 21층 강당에서 개최,이수성 (새마를운동중안회 회장.전 국무총리)를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대회를 앞두고 국가보훈처 사단법인 등록을 위해 불교계(조계종.태고 종)에 도움을 요청한 운암 선생기념사업회는 수 차례 불교계에 도움 을 요청했으나 "불교계 사업이 우선"이라는 조계종 지관 총무원장 스 님과 이운산 태고종 총무원장의 통보를 받았다. 김성숙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불교계에서 황우석 박사를 후원하는 일도 보람된 일이지만, 유일한 스님출신으로 우리나라 광복을 위해 임 시정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신 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념사업 회 탄생을 축하해주며 화환이라도 보내줘야지 도리지, 무관심하며 불 사관련 사업이 우선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강하게 성토했 다. 운암 선생은 승려 신분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중국에서 공산당 주 은래 등과 손잡고 항일투쟁에 선봉에 나서며 조국광복을 위해 애쓰셧 다. 이후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을 이끌면서 "한국국민당(김구)","한 국독립당(조소앙.홍진)","조선혁명당(지청천.최동오)","조선민족혁명 당(김원봉.김규식)","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조선청년전위동맹(신 익희)" 등을 규합하여 우리나라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그의 일생은 우리나라 독립투쟁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남양주 봉선 사서 수학하다 손병희와 만해 한용운 스님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에 투 신했고, 해방 후에는 반 이승만 정권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에 동참했다.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고 재야운동에 참여하며, 신민당 창당에 참여 지도위원을 역임했다.가난 속에서 병고와 싸우다가 쓸쓸 하게 절명하면서도 김성숙 선생은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야"였다. 그는 평안북도 철산(鐵山)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성암 (星巖), 아호는 운암, 성숙은 법명이다.자식이 없어 고심하던 그의 어 머니는 미륵부처님께 3년간 기도를 하고 성암을 낳았다. 농사일을 도 우며 틈틈이 글방에 나가 한문을 배웠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전국 곳곳에 독립학교가 설립됐다. 성암 의 고향에도 대한독립학교가 세워졌다.10살 때 입학한 성암은 그곳에 서 을지문덕, 이순신 등 외부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 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학교는 문 을 닫고, 그 자리에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섰고 성암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일본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직접 한문을 가르쳤다. 그 무렵 삼촌이 성암의 집을 찾아왔다.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 내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이었 다.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성암은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 을 결심했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편집해설 김학준〉에 실린 성암 의 회고다.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 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는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 해 쓴다면 용서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나온 성암은 만주로 향했다. 원산에 도착한 그는, 뜻하지 않게 거동수상자로 몰려 붙잡힌다.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소년이 원산에서 서성대는 것이 이상했던 것. 결국 성암은 몇몇 어른들 손에 이끌려 부 모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여관에 붙들려 있게 됐다. 성암은 새벽 산책하던 중 그는 스님을 한 명 만났다.여관주인에게 벗 어날 심산으로 스님에게 말을 건넸다.“여보시오, 스님. 스님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출가하려 하느냐?” “경전을 연 구하려고요." 스님은 자신을 양평 용문사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자신 을 따라가면 출가할 수 있다고 했다. 성암은 그길로 양평 용문사로 가 출가하고, 그 곳에서 2년 6개월 정도 수학했다.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면서 성암은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찰의 사 무도 맡아 처리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월초(月初) 거연(巨淵)스님 (1858~1934)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암은 월초스님에게 사미계를 받 고, 1922년 4월8일 성월(惺月) 일전(一全)스님을 계사로, 월초스님을 존증아사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 때 받은 법명 "성숙"은 평생 그 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 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 한용운 스님 (1879~1944)도 만나게 된다. 성숙의 회상이다."노스님은 손병희와 막 역한 사이였는데, 스님은 손영감이 오면 나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졌다. 만해스님과 김법린(1899~1964)도 자주 만났 는데 두 사람 모두 그 때 이름이 널리 나 있었다." 손병희, 만해 한용운 스님, 김법린 등과의 인연으로 성숙도 3.1운동 에 가담한다. 독립군이 되겠다고 집을 나선지 5년만의 일이다. 그는 봉선사 몇몇 스님들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 리고,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 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가 석방돼 나올 무렵, 조선에는 사회주의사상이 퍼져있었다. 만주, 상해,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해 비밀리에 사회 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 성숙도 1922년 무산자(無産者)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 다."처음에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에 가 입했지만, 이 단체를 통해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들이게 됐다”는 것 이 그의 설명이다.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3년 김규하.김봉환.김정완.윤종묵.차 응준스님 등 5명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 도착한 그는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장건상(張建相. 1882~1974), 양명(梁明),장지락(張志樂. 1905~1938) 등과 함께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하고 〈혁명〉이란 잡지를 발행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 을 결성했다. 공산주의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에 뒀던 성숙,좌.우익으로 갈라선 조국 통일을 위해 애쓰고 해방되는 날까지 숨 가쁘게 투쟁해왔던 그에게 “해방된 조국이 준 선물은 미군정반대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 금 고형, 좌익인물이라는 낙인, 그리고 박해"였다. 신동아에 실린 "김성숙 회고록 - 한국현대사, 중도좌파의 비극적 종 말"에는 해방 이후 고단했던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지난 1969년 4월15일에 실린 동아일보 기사 표제는 "애국지사 고(故) 김성숙 옹, 중태 이르도록 병원 한번 못간 가난, 유산은 단칸집 한 채, 퇴원비 만원 없어 허덕여"였다. 1961년 5.16 군사 쿠테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 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냈다. 그나 마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돼 석방 될 수 있었던 것. 이 때부터 그를 도와주던 손길도 끊어졌다. 정권의 눈이 두려웠기 때 문이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때 봉선사 운허(耘虛)스 님 (1892~1980)은 가끔 쌀을 보내 성숙의 생계를 도왔다. 말년에 천식 으로 고생했던 그는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민족을 밝히던 별이 그렇게 사라졌다. 지난 2005년4월 23일 불교신문에 보도된 김성숙 선생의 기사에는 "핍 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혁신 계 인사가 됐던 김성숙 선생. 되돌아온 것은 가난과 탄압이었지만, 부 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었다. 파란만장하 고 고단한 삶 속에서 그가 꿈꾼 것은 독립.통일.민주화였다." "이를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성숙에게 정부는 그가 죽은 지 10여년 후 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의 유해는 2004년에야 국립 묘지에 안장됐다. 아직도 불교계에서 그는 잊혀진 존재다. 만해스님. 김법린과 마찬가지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요,정치가였음에 도 불구하고 그를 추모하는 이가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라 고 표현한다. 또한"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공양한 "보살" 성숙.그가 제 대접을 받을 날은 언제일까?"라고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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