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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운암
| [불교신문] 근대불교,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9> 대한민국 임시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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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조회수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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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4
![]() 어둠 깃든 새벽, 압록강 목선(木船)에 실린 독립운동의 불씨 만주에서는 미곡상 위장해 독립운동 소식 국내로 전달 비밀특파원으로 자금 모금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수많은 스님과 불자들은 비밀 항일단체에 가입하며,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조직적인 대일 항쟁을 위해 임시정부 수립에도 나섰다. 한성(서울), 러시아 연해주, 중국 상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성 임시정부에는 불교계 인사 두 명이 참여했다. 이종욱 스님과 박한영 스님이다. 이종욱 스님은 1919년 3월 하순, 동지들과 인천 월미도에서 비밀 회합을 갖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하는 임시정부 조직에 힘을 보탰다. 박한영 스님 역시 정부 조직, 일본 정부에 대한 조선 통치권 철회 요구, 파리 강화회의 대표 선정 등 의결에 참여했다. 이후 한성 임시정부가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면서 불교계 활동 무대도 상해로 옮겨갔다. 송세호 스님은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위원으로 선출되고, 강원도 대표로 임시의회 역할을 한 의정원에서 활동했다. 3·1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신상완, 백성욱, 김법린, 김상헌, 김상호 스님 등은 ‘전국불교도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고, 1919년 4월 하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항일운동을 논의했다. 귀국 후 이들은 해외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비밀 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했다. 만주 안동현에서 미곡상으로 위장한 동광상점을 개설한 뒤, 상해에서 보내온 소식을 신문 이면에 화학 약품으로 새겨 새벽녘에 목선(木船)을 타고 국경을 넘었다. 서울에 도착한 내용은 등사판으로 인쇄돼 전국에 뿌려졌다. 디지털도, 암호화 통신도 없던 시대에 목숨을 건 ‘아날로그 정보전’이었다. 1919년 11월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서 불교계의 항일투쟁을 대내외에 공식 선언하는 문서가 발표됐다. 대한승려연합회(大韓僧侶聯合會) 명의의 독립선언서다. “한토의 수천 승려는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으로, 발표 일자를 ‘대한민국 원년 11월15일’로 표기해 임시정부 수립을 분명히 지지했다. 선언서는 국한문·영문·한문 3개 언어로 작성됐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 외교사절에게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무장투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을 호소하려는 의도였다. 말미에는 오만광, 이법인, 김취산 등 12명의 스님이 일제의 눈을 피해 가명으로 서명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국내 21명의 특파원을 선발해 선전·계몽 활동을 맡겼는데, 그 가운데 불교계에서 이종욱 스님(함경남북도, 경기도 담당)과 신상완 스님(강원도 담당)이 선정됐다. 이듬해에는 전국 단위 특파원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상해 임시정부와의 연계 속에서 불교계가 제안한 가장 대담한 구상은 ‘임시의용승군(臨時義勇僧軍)’이었다. 신상완 스님이 주도한 이 계획은 전국의 스님들을 군대식으로 편제해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1920년 1월, 신상완 스님은 직접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 승려 의용대 편제안을 제시했고, 안창호도 동의해 군무부(軍務部)에 정식으로 검토를 요청했다. 계획은 구체적이었다. 총령부 아래 비서국, 참모국, 군무국 등을 두고, 전국을 도·군·산 단위로 나눠 각지 사찰에 비밀 연락소(기밀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신상완 스님은 귀국 후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석왕사에 선언서와 헌제(憲制)를 발송하며 조직 구축에 나섰으나, 1920년 4월 체포되면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임시정부의 가장 절실한 문제는 자금이었다. 상해를 방문한 불교 청년들은 망명정부의 빈곤한 실상을 목격하고 군자금 모집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중심에는 백초월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1919년 4월 서울 중앙학림에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를 설치하고 전국 사찰과 승려들을 대상으로 자금 모집에 나섰다. 천은사, 화엄사, 쌍계사 등의 사찰이 응했고, 모금된 군자금은 임시정부의 안창호에게 직접 전달됐다. 한성, 상해 임시정부 참여 승군 조직 무력 항쟁 도모 국무위원 된 ‘운암 김성숙’ ![]() 범어사 출신 불교 청년들도 1919년 10월 거액의 군자금을 한데 모아 김상호 스님을 통해 상해에 보냈다. 1920년 무렵에는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신상완, 김상헌 스님이 체포되면서 좌절됐다. 각각 5년,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군자금 모집은 개인 차원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통도사 학인 이석윤 스님은 불과 21세의 나이에 경기도 안성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체포됐고, 고성 옥천사 한봉진 스님은 임시정부 요원과 함께 활동하다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김봉률 스님은 출소 후에도 1922년부터 1925년까지 광복군 활동을 이어가다 4차례나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거듭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운암 김성숙이다. 1919년 3·1운동 봉선사에서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스님 등과 함께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 약 200매를 비밀리에 작성해 인근 마을에 뿌렸다. 격문 내용은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 지위를 얻게 됐으니 조선도 독립운동에 나서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경에 체포된 후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비밀결사 조선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무장 독립투쟁의 전선에 섰다.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임명됐다. 이듬해에는 외교연구위원으로 외교 전략을 연구하고, 선전위원으로 대외 홍보와 선전 활동을 총괄했다. 1945년 12월1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환한 후에 분단과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도 통합 노선을 걷다가 1969년 별세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봉선사의 홍월초 스님은 1934년 입적을 앞두고 14개 조항의 유촉서(遺囑書)를 남겼다. 이 유촉서 안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던 김성숙을 지원하라는 당부도 담겨 있었다. 승복을 벗고 상해로 향했던 스님들, 새벽 강을 건너 소식지를 날랐던 청년 불자들, 사찰 재산을 담보로 독립자금을 마련한 이름 없는 승려들, 그리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김성숙까지. 교과서에서 배운 독립운동의 이면에는, 불교계가 쌓아 올린 또 하나의 치열하고 깊은 역사가 있었다.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선열들을 기억하고 뜻을 계승하는 것은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라면서 “운암 선생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들의 독립운동 정신과 애국애족정신을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3920호/2026년5월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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