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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선열들의 ‘지혜’
관리자
조회수 : 2535   |   2019-04-15


지난 12일 오후 전남여성플라자에서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날 방청객들이 학술회의를 지켜보고 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독립운동 역사 되새겨야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제정세 변화 독립 기회로 여겨
임시정부 시절 국회 임시의정원서 국호 ‘대한민국’결정

호남지역 3·1운동 종교인·일반인 망라 각계각층 참여

문화유산 체계화, ‘의향’ 광주·전남지역 역사교육 필요

‘음악 전사’정율성, 군정학교서 항일전사들 육성 담당도
고려 삼별초와 임진왜란 의병…무장투쟁의 산실 ‘의열단’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광주·전남 지역의 항일 역사를 되짚어 보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번 학술회의는 민족 해방의 역사조차 정확히 모르는 채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불멸의 가치인 선열들의 독립 정신을 일깨우고,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광주·전남 지역의 항일역사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학술회의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와 홍영기 전 순천대 교수, 한규무 광주대 교수를 비롯 중국 등 국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사를 현장에서 취재해 보도한 이건상 전남일보 선임기자, 정용식 남도일보 상무가 주제발표에 나서 선열들의 피와 땀이 어린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청중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각각의 주제발표 내용을 정리해 전해본다.


시준 단국대 명예교수.

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많은 나라들이 두 패로 나뉘어 치른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들이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현실로 보면 파리강화회의는 한국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한국은 추축국인 독일과 전쟁을 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에 연관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은 승전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가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갖게 됐고, 이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자 했다.

이후 상해에 모인 인사들은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1919년 4월 10일 현순· 손정도· 신익희· 조소앙· 이동녕 등 29명이 대표가 돼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임시의정원을 구성한 일이었다. 임시의정원은 현재 국회와 같은 것이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선 국호, 관제, 국무원 선출, 헌법제정 등이 논의됐다. 가장 먼저 결정된 것은 국호였다. 국호는 신석우가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의해 그대로 가결됐다. 이로써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 이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군주가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군주주권의 역사였고, 군주가 주권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제의 역사였다.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이 군주주권과 전제군주제의 역사였던 셈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국민이 주권을 갖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민이 주권을 갖는 새로운 역사를 연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한규무 광주대 교수. 

 

◇호남지역 3·1운동과 광주·전남=호남지역 3·1운동의 종교계 참여 지역을 정리하면 대체적으로 전남에서는 기독교, 전북에서는 천도교의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세시위가 확인되는 37개 지역 중 종교계가 참여한 지역은 21개(56.8%)로 나타난다. 전남 최초의 사례인 광주와 전북 최초의 사례인 군산, 만세시위가 활발했던 임실과 전주, 함평, 익산, 광주 중 함평만 제외하면 모두 종교계의 참여가 확인되는 지역이다. 이로써 단순히 판단하자면 종교계의 참여가 확인되는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상대적으로 신속, 활발하게 전개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호남지역 종교계는 어떤 계기에서 3·1운동을 준비하게 됐을까? 천도교 측에서는 조직적, 기독교 측에서는 개인적인 통로로 만세시위가 준비됐다. 천도교측은 3월 1~2일 서울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가 전주교구과 남원교구를 거쳐 다시 각지 교구로 전달됐다. 천도교 교구조직이 체계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반면 기독교측은 조직이 활용되지 않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준비가 시작됐다.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소식을 듣거나 서울에서 내려온 인사들이 개인적 인맥을 활용해 준비에 착수했다. 예컨대 3월 10일 만세시위를 벌인 광주의 기독교계에서는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 및 조선독립광주신문 등을 넣은 봉투를 목포 영흥학교 교장 다니엘 커밍(Daniel J. Cumming, 김아각)에게 전달했다.

호남지역 3·1운동을 종교계 중심으로 살펴봤으나 그렇다고 해서 비종교인들의 참여가 저주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종교인들이 부각된 것은 그 조직과 인명의 파악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특정학교의 학생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은 무종교 일반대중의 경우 그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게 된 경위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종교계의 교회-학교-병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성과가 쌓여 있으므로 ‘무종교 일반대중’의 조직화 과정이 향후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이건상 전남일보 선임기자. 

 

◇일제 강점기 중국 내 좌파 무장세력, 조선의용군 음악전사 정율성을 중심으로=정율성은 1914년 광주 불로동과 양림동 일대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어린 시절인 1917년 화순 능주면으로 가족 전체가 이주, 1922년 능주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이후 1923년 숭일학교를 거쳐 전주 신흥중학교에 적을 뒀으나 1932년 중퇴했다. 그는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1945년 해방시기 까지 12년 동안 조국의 광복을 꿈꾸는 항일무장대의 중견간부 학생으로, 비밀공작 항일운동가로, 조선의용대의 항일무장투쟁의 전사이자 교육자로 활동했다.

정율성은 1933년 넷째 형 정의은을 광주에서 만나 나주 출신 김재호 등 5~7명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정율성의 중국 행은 음악활동이 아닌 항일 무장세력의 간부를 육성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간부학교) 입교를 위한 것으로 장차 항일운동 무장체의 근간이 되고자 함이었다. 정율성은 1933년 간부학교 입교와 동시에 의열단에 가입했다. 간부학교 제2기생의 경우 입학의 전제 조건이 의열단 가입이었다. 정율성은 “의열단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 기반에서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고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도모한다. 의열단 입단 후 단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라는 서약서에 ‘류대진’이라고 직접 서명했다.

정율성은 1937년부터 40년까지 연안에서 혁명음악가로 활동했지만, 1940년~45년에는 태항산과 연안을 오가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간부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그는 각급 군정학교에서 핵심 간부로 항일전사들을 육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가 적후무공대로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파악되나 주 업무는 항일교육가로서 전사들을 육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율성이 연안에서 활동하면서 대외에 이름을 보인 것은 1939년 1월1일 성명서였다. 정율성은 서휘 등 9명과 함께 김구, 김원봉, 김성숙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단합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주의(主義)와 당파를 가리지 말고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바라는 동포라면 조국독립의 깃발 아래 뭉치기 바라며, 지금의 유일한 임무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으로 통일하고 단결해야만 조선민족을 해방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정용식 남도일보 상무. 

 

의열단의 결성과 투쟁=잊혀진 이름 의열단은 영화 밀정과 암살을 통해 새롭게 대중들에게 각인이 되고 그 단장이었던 김원봉에 대한 서훈 수여문제가 보훈처를 중심으로 표면화 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100주년 축사에서 ‘빨갱이 낙인은 청산해야할 대표적인 친일잔재라며 좌우의 적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수단’이라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훈 수여를 전향적으로 추진할 것을 시사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일제가 가장 두려워해 현상금 최고액을 내걸었던 인물이었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독립투사는 김원봉 뿐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는 1919년 의열단을 만들었고, 193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서 독립군 부대인 조선 의용대 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지내면서 의열, 무장투쟁의 선봉에서 일제에 가장 큰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광복 후 일제 앞잡이였던 경찰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1947년 월북해서 북한 정권에 기여하다 1958년 숙청당했다.

이로 인해 남과 북 어디에서도 기억해주지 않는 비운의 혁명가가 됐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 명단이나 유공자 대상에 김원봉은 없다. 그가 이끌었던 의열단도 독립적 사상노선이었던 아나키즘을 표방하고 급진좌파였기에 남북 모두에서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대일 테러를 위한 독립운동단체로 결성됐다. 192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인 일제하 대표적인 의열투쟁 조직이었으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걸쳐 민족주의 혁신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변모된 비밀결사적 조직이었다. 의열투쟁은 개인 또는 소규모 조직에 의해 적은 비용으로 기동성과 집중성을 최대한 살리며 수행하는 암살과 피괴 활동이다. 따라서 일의 성패와 무관하게 식민권력에겐 두려움과 위기의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의열투쟁의 정신적 기원은 멀리 고려시대의 삼별초, 임진왜란 당시 의병, 또 1900년대 항일의병 운동과 연계돼 있다. 일제 강점기의 의열투쟁은 해방 후에는 군사독재와 분단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과도 정신적으로 연계돼 있고, 불의에 저항하는 의열적 태도가 민주화운동, 반독재 투쟁의 역사적 전통성의 기원이기도 한다. 따라서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등도 의열투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리·중서부취재본부/이은창 기자 lec@namdonews.com 

 

 

 

지난 12일 오후 전남여성플라자에서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린 가운데 김성의 남도일보 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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